2019년 40대 주부 H씨는 TV 홈쇼핑을 보고 필리핀 세부 패키지여행 상품을 구매했다. 따뜻한 날씨를 만끽하며 푹 쉬는 여행을 기대했으나 가이드는 좀처럼 휴식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차례 쇼핑센터 방문이 이어졌고, 집요하게 스노클링 같은 선택 관광을 권유했다.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않자 가이드 태도가 달라졌다. 급기야 버스에서 손님과 언성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투어가 끝날 무렵 가이드는 팁 명목으로 1인 40달러씩 거둬 갔다.
쇼핑과 옵션(선택 관광) 강요, 가이드 팁 징수….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싸구려 패키지여행 상품의 전형적인 피해 사례다. 일본 규슈 페리 여행(선내 2박) 14만9000원, 중국 태항산 여행(4박5일) 19만9000원, 베트남 다낭 여행(3박5일) 24만9000원. 30년 전 여행사 광고가 아니다. 2023년 6월 현재 팔리고 있는 패키지여행 상품이다. 항공권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의 여행 상품이 버젓이 팔리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것일까.
상품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 비수기, 여행사는 항공료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의 여행 상품을 내놓는다. 그리고 랜드사(하청 여행사)에 ‘알아서’ 수익을 내라고 떠민다. 랜드사는 현지 가이드에게 다시 수익을 떠넘기고, 가이드는 쇼핑센터와 옵션 업체, 단체 전문 식당이나 호텔로부터 받는 수수료로 적자를 메운다. 현금으로 받는 팁도 물론 한몫한다.
예를 들어보자. 정상 판매가 50만원(항공료 20만원+숙소·식사·차량·관광 30만원)짜리 여행 상품이 있다. 여행사는 50만원짜리 상품을 20만원에 판매한다. 전형적인 덤핑 상품으로, 딱 항공료만 건지는 가격이다. 적자 상태로 손님을 떠맡은 가이드는 쇼핑·옵션 등을 강요해 손님 한 명당 30만원 이상 남겨야 한다. 가이드도 쉽지는 않다. 여행업계 은어로 ‘쇼핑이 터져야’ 가져가는 게 생긴다. 여행업계 원로 S씨는 “항공사에서 여행사, 여행사에서 다시 랜드사로 이어지는 갑을 관계와 여행사 간 과열 경쟁이 기형적인 덤핑 상품을 낳고 있다”고 꼬집었다.
덤핑 상품을 추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소비자의 외면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스스로 ‘낚이는’ 소비자가 의외로 많다. 패키지여행사 관계자는 “49만원짜리 상품을 제값 내고 가는 것보다 현지에서 쇼핑과 옵션을 돌리는 29만원짜리 상품을 선호하는 손님이 많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조사기관 ‘컨슈머인사이트’에 따르면 2023년 1~5월 해외 여행객의 29.1%가 패키지여행을 이용했다.
여행사를 통해 겪을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건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순 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여행업협회(KATA)에서 운영하는 ‘여행정보센터’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소비자24’ 홈페이지에서 여행사 정보와 영업보증보험 가입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들 홈페이지에 등록된 여행사는 폐업하더라도 보상받을 수 있다. 싼 상품일수록 일정표와 계약 내용, 약관을 면밀히 봐야 한다. 숙소와 식사에서 유난히 분쟁이 잦다. 일정표 대부분에 ‘현지식’이라고 성의 없이 표시됐거나 ‘4성급 특급호텔(또는 동급)’이라고 아리송하게 적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형 패키지여행의 강력한 장점도 있다. 2019년 5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람선 침몰 사고가 났을 때 여행객 30명을 보낸 참좋은여행은 피해자 가족 약 40명의 현지 체류를 지원했다. 지난 5월 태풍 마와르가 괌을 덮쳤을 때 한국인들이 고립되자 모두투어·하나투어·인터파크 등 주요 여행사가 협의해 고객의 추가 체류비를 지원하고 비상식량을 챙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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