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이야기
[자유] 한밤의 기다림
  • 자기랑꽃이랑 브론즈 파트너스회원
  • 2024.07.08 21:43 조회 220

아무리 작은 소리도 자정이 지나면 귀에 거슬린다. 하물며 반복되는 기계음 소리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달 이사온 윗층에서 새벽 1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모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찌~익 찌~익 끊어질듯 이어지고 이어졌가다 멈추기를 수 십 차례 반복한다.  

 

참! 예의도 없다. 한밤 중에 어쩜 저렇게 염치없는 짓을 할까? 아랫집에 인내력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온갖 투정이 났지만 내일은 그치겠지 하고 꾹 참고 지낸지 벌써 한달을 넘겼다. 가끔 층간 소음으로 이웃간 다툼이 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역지사지 하지... 서로 조금만 이해하지..." 하며 탓하였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인내력에 한계가 느껴졌다. 몇날을 벼르다 오늘 아침 일찍 단단히 맘을 먹고 올라갔다.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딩동댕 딩동댕'   


'누구세요?'  


'아랫집입니다.'  


90을 전후한 할머니가 잠을 설치셨는지 눈을 비비시며 빼꼼히 문을 연다.  

'아랫집에서 왔습니다. 날마다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렇잖아도 밤마다 죄송스러웠는데 미처 양해를 드리지 못했네요. 사실은 며늘아기가 심장질환으로 주기적으로 ...  인공호흡을 바로 하지 않으면..."

고개를 반 쯤 숙이시며 말을 잇지 못하신다.   


당황스럽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  


이번엔 내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순식간에 원고와 피고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단단히 맘 먹고 왔는데 예상치 않은 복병이 상황을 한방에 역전시켰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걸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무겁다.

   

나는 안다. 인공호흡기의 공포를... 30년 전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딸아이의 가늘어진 숨을 이어주던 그 기계음의 처절함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을 앞두고 숨 죽이며 들었던 기계음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찌~익 찌~익"  


저녁 무렵, 윗층 할머니가 알이 굵은 복숭아 한 상자를 들고 내려오셨다. 

'아닙니다. 할머니... '  


순간 당황했다. 도저히 받아서는 안 될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전심을 다한 위로의 선물이라도 전해야 할 입장인데 난감했다. 남의 아픔을 나누진 못 할 망정 그걸 핑게로 선물을 받는다는 건 파렴치범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 손을 저으시며 커다란 상자를 문앞에 놓고 쏜살같이 올라가 버리셨다.


그날 이후, 자정이 지나도 그 모터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혹시나? 아랫집 생각하며 힘들어도 참고 계신 건 아닌지요? 할머니."


듣기 거북하던 그 소리가 기다려진다. 마침내 밤공기 뚫고 찌~익 찌~익 기다리던 그 기계음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순간! 휴우 ~~휴우~~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왜 이제 울려! 얼마나 기다렸는데 한 영혼이 소생하는 소리, 천사같은 시어머니 사랑이 탄로나는 소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소리인데! 


'역지사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사자성어다.  그럼에도 남의 입장을 꼼꼼이 새기지도 못한 얼치기 역지사지가 얼마나 많은가? 혹시 저만의 은밀한 예외를 숨긴 성어가 아닌가? 나라면 그리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막연한 이해는 공허한 투정이다. 남의 형편을 온전히 알기 전까지는!


오늘 밤에도 한밤 중 울리는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행여나 울리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된다. 울려라. 울려울려... 울려야 한다!


햇포도가 나오면 알이 튼실한 것으로 한 상자를 놓고 와야겠다. 아무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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