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봐. 난리가 났을 거예요. 우리도 똑같은 국민 아니냔 말이에요."
지난 7일,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마을회관에선 주민들의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안 찾아온 방송사나 신문사가 없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다 보니 치매 오게 생겼다"면서도, 취재진을 보고는 하소연을 이어갔습니다.
주민들을 괴롭히는 건 지난 7월부터 다시 시작된 북한의 대남방송입니다. 쇠 가는 소리,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 늑대 우는 소리, 이상야릇한 소리…. 각자 들어본 소리를 늘어놓자 끝이 없었습니다.
■수면제 먹는 어른들,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
당산리에서 농사를 짓는 박혜숙 씨는 서울살이를 하다 10년 전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릴 적 좋았던 기억에 돌아온 당산리지만 "고향과 논을 다 포기하고 떠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했습니다.
김완식 씨도 잠을 못 자겠다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지자체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검사를 했는데, 검사받은 주민 모두가 수면 부족 상태였다고 말했습니다.
당산리 주민들은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으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약을 타려면 읍내 병원까지 나가야 하는데,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는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잠을 못 자 구내염이 생기고, 수업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안미희 씨는 "아이들이 소리가 무섭다며 집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며 "(방송이) 하루 안 나온 날이 있었는데, 석 달 만에 아이들이 밖에 나가 자전거도 타고 트램펄린도 탔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 소리를 멈춰 주세요"…넉 달 만에 방음창 설치하기로
접경지 주민들이 바라는 건 간단합니다. '잠을 자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민들은 민간 단체가 대북전단을 살포하자 북한이 쓰레기 풍선을 날리기 시작했고, 우리 군이 대북방송으로 맞서자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응수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민들은 ①대북전단 살포를 막고 ②대북방송을 중단하고 ③방음창 등 방음 시설을 설치해달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대북전단의 경우 어느 정도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지만, 최근 경찰은 대북전단을 날린 민간단체 대표 2명을 검찰에 넘겼습니다. 2kg이 넘는 대북전단을 '무인자유기구'로 보고 항공안전보안법을 적용한 겁니다.
경기 파주시와 김포시, 연천군이 지난달 15일부터, 인천 강화군이 지난 1일부터 '위험구역'으로 설정돼 대북 전단 살포가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대북방송과 관련한 우리 군의 입장은 강경합니다.
주민 피해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대응 방침에 변화가 있냐는 KBS의 질의에, 군 관계자는 "대북 대응 기조에는 변화가 없다"며 "주민 피해와 관련해서는 관계 기관들의 대응책 마련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라고도 덧붙였습니다.
주민들도 대북방송을 끄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방음창이라도 설치해달라고 요구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인천시 관계자는 "현행 민방위기본법에는 개인에 대해 보조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지원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천시는 행정안전부와의 논의 끝에 당산리 35가구에 대해 예비비를 투입해 방음창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주민들이 소음 피해에 시달린 지 넉 달 만에 내려진 결정입니다.
■DMZ 일대 주민들도 피해…"접경지만의 문제 아냐"
악화일로를 걷는 남북 관계에 피해를 보고 있는 건 당산리 주민들만이 아닙니다.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서 7년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윤설현 씨는 인근 상권이 죽어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일대 주민 대부분은 임진각과 제3땅굴, 도라전망대 등을 돌아보는 'DMZ 평화관광'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윤 씨는 "보통 학교들이 예산을 쓰는 시점이 10~11월이라 이맘때 수학여행을 많이 온다"며 "올해는 '이 난리에 DMZ까지 갈 이유가 있냐'며 예약이 취소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남북 연결도로를 폭파한 지난달 15일에도 대만인 가족 4명이 게스트하우스 예약을 취소했습니다.
주민들은 생계에 받는 지장보다 무서운 건 전쟁의 공포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서 30년째 농사를 짓는 전환식 씨는 "총소리가 나면 예전엔 '사격장에서 훈련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깜짝 놀라서 뛰어나와 본다"며 "평생 살면서 일궈둔 터전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인터뷰 말미, 윤설현 씨는 취재진에게 "살기 힘들단 이야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며 "여기 사는 우리 모습이 남북관계의 바로미터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윤 씨는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지다 보면 궁극적인 피해는 한반도 전체가 보게 될 것"이라며 "주민들이 입는 피해를 접경지만의 특수한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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