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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실종, 카다피 차남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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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3 09:52 조회 1,245

NYT, 사이프 카다피와 인터뷰 공개
부친 피살된 뒤 도주, 손가락 둘 잃어
반군에 붙잡혀 생사 여부도 불투명
“2년반 추적, 화려한 은신처서 만나
리비아 대통령 복귀 꿈꾸고 있다”




꼭 10년 전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49)는 모든 걸 잃었다.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아버지 무아마르 카다피가 반군에 암살된 이후 물려받을 것으로 당연시됐던 권좌는 물론 도주하다 생포되는 과정에서 손가락 두 개도 잃었다. 이후 10년, 그의 행방은 물론 생존 여부도 불투명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중동 전문기자 출신 로버트 워스가 그를 추적하기 전까지는.


사이프 카다피가 워스와의 인터뷰에서 침묵을 깼다. 약 6만2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인터뷰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NYT 매거진 톱기사로 게재됐다. ‘카다피의 아들이 살아있다. 그는 리비아의 대통령을 꿈꾼다’는 제목을 달고서다. NYT의 레바논 베이루트지국장을 지내고 평생을 중동 취재에 바친 워스는 사이프 카다피 인터뷰를 위해 지난 2년 6개월간 공을 들였다.

아랍어로 ‘이슬람의 칼’을 의미하는 사이프 카다피는 차남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장남은 아니지만 후계자로 낙점됐다는 점 때문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아버지 카다피는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를 이은 친분을 과시했다.

사이프는 영국 명문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국제 감각을 갖췄다. NYT는 “완벽한 영어와 민주주의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이프는 한때 국제 사회의 희망이었다. 리비아를 점진적으로 혁신할 인물로 받아들여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리비아의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데 앞장서며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반군에 생포된 그는 푸른 수의 차림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재판정에 섰다.


10년 뒤, 상황은 변했다. 그는 풀려났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거처는 확실치 않다. 인터뷰 상황을 워스는 이렇게 전했다. “(승용차에 우리를 태운 이후) 어느 방으로 안내됐는데 불쑥 누군가가 악수를 청했다. 엄지와 검지가 없었다. 사이프 카다피였다. 그는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고 (리비아 국기 색이기도 한) 녹색 빛 의자에 앉게 했다. 두꺼운 양탄자와 커튼,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둘러싸인 방은 화려했고, 치장하는 데 돈이 꽤 들었을 것 같았다. 사이프 역시 금술이 달린 화려한 옷 차림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워스가 “여전히 죄수 신분이냐”고 묻자 사이프는 “아니, 난 자유의 몸”이라며 “정치권으로 컴백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다.

카다피 가(家) 몰락 이후 리비아엔 새 시대가 찾아왔지만, 국민은 여전히 궁핍하다. 사이프 카다피가 정치 컴백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리비아가 현재 처한 어려움 때문이다. 그는 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군은 나라를 강간한 것과 마찬가지야. 무릎을 꿇렸고, 돈도 이젠 없고 안전보장도 안 돼 있지. 삶이라는 게 없어. 주유소에 가보게. 넣을 기름이 없어. 우린 산유국이고 이탈리아에 수출까지 하는데 말이지. 이건 재앙 수준이야.”

하지만 워스는 “카다피가 컴백을 꿈꿀 수 있는 건 그가 그동안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그의 존재가 잊혀졌던 덕분에 그나마 재기를 꿈꿀 수 있는 것이며 리비아 국민이 그를 다시 권력자로 인정할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사이프 카다피 역시 이 점을 알아서일까. 대선 출마를 직접 시사하지는 않았다. 워스는 “리비아 안팎에선 그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란 예상도 나오지만 정작 그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국가를 다시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했다”고 적었다. 리비아의 대선과 총선은 올해 12월로 잡혀 있다.

사이프에 대해 워스는 “독재자 아버지를 보며 성장한 사이프는 서구 중심 국제 사회와도 잘 지내야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유학도 했다”면서도 “그러나 한 가지 바뀌지 않는 사실은 그는 카다피 가의 일원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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